*이 글은 2016우민아트센터에서 기획된 전시 'Three open gesture'의 비평글입니다.



망각으로 기억하기: 소리-장소의 자폐적-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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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 깊은 단 하나의 도시풍경이 있다. 십대 시절 내가 살던 집은 번화가 가장자리에 있던 산 중턱의 5층짜리 빌라였는데, 낮았다고는 해도 산이었던 데다 지대가 높았던지라 옥상에 올라가면 휘황한 도심이 한눈에 들어왔다. 골목에서 공을 차고 놀던 꼬마들이 모두 집에 들어가고 나면 시끄러울 일이 없었던 동네여서 밤은 고요함밖에 없던 시간이었다. 나는 가끔 옥상에서 한참을 앉아있다 내려오곤 했다. 내가 자리한 곳의 정적을 뚫고 들어오는, 저 멀리 어디선가 시작된 휘몰아치는 도시의 소음이 무척 강렬했기 때문이었다. 그 소리는 하늘 어딘가에 구멍이 뚫려 어마어마한 양의 공기가 빨려 들어가는 소리 같았고, 수 만대의 자동차에서 진동하는 엔진소리, 수십만 사람들의 발자국이 합쳐진 소리 같기도 했으며, 점멸하는 불빛의 전파음 같기도 했다. 그 소리는 또한 두 사람이 소곤대는 목소리처럼 아주 가깝게 느껴지다가도 어떨 땐 보일 듯 말 듯 한 소실점 마냥 너무 멀리 있어서 도시 전체가 비어버린 것처럼 기이한 거리감을 만들어냈다. 하루는 도시가 뿜어내는 소리의 진원지가 어딘지 직접 확인하고 싶어 지도를 펼쳤다. 눈에 들어왔던 도심 중 한 곳을 대충 정하여 점찍고 콤파스로 나의 집에 이르는 거리만큼 다리를 벌려 원을 그렸다. 그리고 그날 밤 반대편을 찾아가보았는데,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곳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내가 알던 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전혀 다른 음역대에 있었고 처음 느끼는 두께였으며 거리였다. 그 때 나는 비로소 소리의 핵을 찾는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며, 모든 장소는 저마다의 소리를 조형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소리는 조절되고 변화하는 형체를 지닌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고유한 것으로서 그 장소에서 형성된다는 것. 이것은 내게 하나의 미학적 체험으로 각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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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적인 것은 부분의 합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결핍이라는 개념은 존재할 수 없으므로, 전체는 부분이자 부분은 그 스스로가 완전하다. 길다래가 기획하여 선보일 프로젝트 전시 가 바로 그러할 것이라고 상상하면서, 마찬가지로 이 글이 선형적 시간에 속박되지 않고 전시와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기능하며 언제든 독자의 장소에 따라 파편화 될 수 있는 무언가가 되길 기대한다. 오히려, 그래야만 한다. 왜냐하면 이 전시는 개별적이고 특수한 소리-이미지들이 관계 맺으며 끊임없이 갱신되는 장소이기에 가능한 무수히 많은 형용어는 단지 실체 없는 대상의 빗면만을 비스듬히 비출 뿐, 엮이지 못하고 흩날릴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장소가 건네는 손짓(gesture)은, 마주잡을 수 없이 아득하게 가까운 자리에서 살랑-살랑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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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그룹전이 아니라 전체가 하나의 몸인 프로젝트에 가까운 전시다. 기획자는 전시를 이용해 시간을 통제하여 인위적인 장소를 만들려 하는데, 이 장소는 텍스트 낭독, 기계가 만들어 내는 노이즈, 아코디언 세 종류의 소리를 펼쳐 놓는 관계망을 통해 형성된다. 그러나 잘 생각 해 보자. 여기서 채집되는 소리는 자연 상태의 것이 아닌 문화적 산물에 해당한다. 생물학적으로 들을 수 있다(audible)는 사실을 넘어 감각을 통해 소리를 수용하고 그에 대한 반응으로 추상적 사고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회화, 영상과 같은 이미지를 비롯해 악기를 연주하거나 낭독을 하는 행위-형상처럼 전시장 안의 충만한 시각성은 소리를 부연한다- 때문에 이 전시는 소리 자체에 대한 탐구나 급진적인 실험은 아닐 것이다. 외려 소리를 ‘통한’ 무언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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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다래는 2012년 <3 serenade>(2012)라는 제목 아래 빗속을 걸어 다니며 확성기로 카프카의 ‘아버지에게 쓰는 편지’를 읽는 프로젝트를 김온 작가와의 협업으로 기획하였다. 그리고 여러 속도로 메트로놈이 까딱대는 자신의 영상작업 에 맞춰 협소하게 정해진 자리에서 8명의 참여자가 자유롭게 텍스트를 낭독하는 (2015), 그리고 이번 전시의 전신이자 첫 번째 "gesture" 프로젝트였던 (2015)에 이르기까지 기획자는 지난 시간 동안 꾸준히 목소리, 그 중에서도 낭독이라는 것에 큰 관심을 보여 왔다. 목소리라는 것이 이미 한정된 역량을 지닌 신체기관을 통해 만들어짐에도 길다래는 그것을 언제나 또 한 번의 특정한 외적 제약 속에서 다뤄 왔다. 요란한 소리뿐만 아니라 물리적으로 끝없이 장막을 만들어 내는 빗줄기 속에서 확성기는 나약한 증폭기일 뿐이며, 메트로놈은 목소리를 만들어 내는 낭독자에게 거부할 수 없는 박자를 강제한다.
이와 같은 제약 만들기는 단지 소리를 향한 특정한 태도로 보이지 않는다. 작가의 2007년 작업인 는 공책에 짧은 글을 적고 페이지를 넘겨 또 다른 글을 적는 과정을 스톱모션 기법을 통해 만든 영상이다. 여기서 글자는 지속되는 시간(duration)을 통해 형성되지 않고, 단어 단위로 화면에 튀어 오르며 등장하여 문장을 완성한다. 화면에 드러나는 실제 시간(real-time)은 그림자로 비춰지는, 페이지를 넘기는 작가의 손의 움직임뿐이다. , (2008), , (2009), 그리고 가장 최근작인 (2015)에 이르기까지 그의 영상작업은 모두 분절된 시간을 연결하는 스톱모션 기법으로 제작되었고, 특히 <방>을 제외한다면 등장하는 사물은 모두 네모각진 모듈이며 화면은 그것의 기계적인 움직임을 담는다.
사물과 사물의 움직임에 대한 제약이 오브제의 미니멀리즘, 실제-시간의 분절로 화면에 드러났다면, 낭독에서 목소리를 제한하는 것은 텍스트의 기능일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함정식과 길다래는 『카프카와의 대화』, 롤랑바르트의 『마지막 강의』, 다자이 오사무의 『사양』 등에서 일부분을 발췌 해 낭독 할 예정인데, 실상 이 텍스트는 낭독하는 주체들의 목소리를 특정 형식으로 제약하는 매개역할을 할 뿐 내용을 통한 의미 전달을 적절히 수행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텍스트가 외재성으로 환원될 수 없다 해도 그 수신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닌데, 왜냐하면 목소리를 통해 텍스트의 의미가 직조되는 내밀한 장소는 바로 낭독자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한 번은 유투브에서 자신의 이빨을 통해 라디오 신호를 잡아낼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실제로 그것을 실험해 보는 영상을 본 적 있다. 검색을 해 보면, 이빨이 라디오의 전파를 수신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 꽤 진지한 질문과 대답들이 오간다는 걸 알 수 있다. 스티븐 코너는 입이라는 신체 기관이 ‘입술이 후음을 내고, 이와 혀 사이에서, 혹은 목젖과 목구멍 사이에서 공기가 마찰음’을 내며 최초로 소리를 형성하는 곳이자 그 소리를 최초로 ‘일종의 조형적인 촉감으로 느끼는 장소’라는 흥미로운 주장을 한다. 코너는 그 중에서 이의 역할을 두드러지게 지적하는데, ‘외마디, 옹알거림, 꾸르륵대는 소리’만을 낼 수 있는 유아기의 언어는 상징적 질서를 획득해서 의사소통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가 성장하면서 ‘소리를 빼앗고 잘게 썰어’ 내면서 성인의 말이 된다는 것이다. 발성을 통해 입이 내는 소리는 생성과 동시에 ‘나’라는 수신인으로 (조형적인 촉감으로)돌아온다는 것, 이 사실은 꽤 의미심장해 보인다. 목소리의 수신인은 공기라는 매질을 공유하고 있는 불특정 다수이기 전에 이미 자기 자신이(었)다. 언어적 표현이자 되돌아오는 감각이라는 굴레 사이에 낀 주체는 누구인가. 낭독은 이미 주체에 의한 소리의 속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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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코디언과 노이즈 사운드는 목소리와 마찬가지로 이미 통제된 소리다. 자크 아딸리는 음악(music)이란 ‘소음(noise)의 구조화’이며, 이는 상품을 만들어 교환의 체제에 편입시키는 사회의 논리와 일치한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음악은 소리의 역사에서 매끈하고 평편하게 조작된 결과물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에 포함 될 전형산이 만들어 내는 노이즈는 아딸리가 말하는 해방적 소음과는 결이 다른데, 정태호의 아코디언이 하나의 악기인 것처럼 기계를 통해 만들어진 정형화 된 노이즈는 일정 수준 음악의 영역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체제와 양립하는 음악의 핵심은 저장되고 복제되어 반복 가능하다는 사실이며 그런 의미에서 반대 항은 시스템으로 환원되지 않는 즉흥일 것이다. 따라서 를 구성하는 소리는 서로 다른 세 종류의 조합이 아니라 ‘강제적으로 제한된 무엇’이라는 공통 속성을 지닌 세 질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들의 낱낱은 메시지를 지니고, 관습적으로 이해되기에 의미를 내파 하는 충격을 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소리가 하나의 열린 장소(전시장)에 놓이게 될 때 이처럼 자폐적이어야 하는 필연성은 되돌아온다. 왜냐하면 전시장이라는 공간에서 소리는 내적으로 완결된 것이 아니라 부유하는 것이 되는데, 스스로를 조직하지 못하는 작품은 매개되지 못하고 그 공간속으로 완전히 용해되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무언가로 변이되기 때문이다. 길다래는 소리를 다룰 때 언제나 개인의 작업이 아닌 프로젝트를 통해서 특정한 시간의 지속과 열린 공간을 상정하고 불특정한 주체들을 호명한다. 즉 그의 실천은 팽팽한 긴장 속에서 닫힘과 열림이 완력싸움을 하고 있는 양가적인 소리-장소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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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주의 지리학자인 도린 매시Doreen Massey에게 장소는 상대적이고 관계적으로 구성, 재구성되는 것으로 정치적 가능성을 지닌 급진적 개념이다. 그에게 장소란 특정한 시간 조건 하에서 무수히 많은 행위자들의 관계에 의해 생성되는 것으로, 주어진 상태가 아니라 과정이고 경험의 양상이다. 매시가 관계성을 토대로 장소를 파악하려 했던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남성중심적으로 편협하게 이해되는 장소의 위상을 재정의 하는 데 있어 결정적이었기 때문이다. 하나의 장소를 특수한 정체성으로 규정할 경우 그 장소는 보다 상급 범주에 종속됨과 동시에 고정된 경계의 테두리를 부여받고 닫힌 상태로 남는다. 즉 그 장소는 보편원리의 사례로 봉합될 뿐이며 그 조건 속에서 돌출된 잉여분은 무시된다. 반면 관계적으로 획득되는 장소는 구체적인 사회적 관계/과정이 상호 교차/작용하며 구성되는 특수한 결과물이자 역으로 보편성을 구성하는 또 다른 관계의 요인으로 기능한다. 이에 따라 보편-특수의 위계는 무너지고 장소는 유동적이고 가변적인 것으로, 그리고 무수히 많은 사회구성체에게 열려 있는 것이 된다. 전자는 매끈하며 안정적이고, 후자는 불안하다.
불안을 감수할 수 있다면, ‘모순과 갈등’으로 가득 차 있는 곳으로 조금 더 나아가 보자. 앞 단락에서 ‘장소’라는 단어를 전시, 작업, 혹은 미술이라는 말로 바꾸어 본다면 내가 하려는 말이 좀 더 구체적일 수 있을 듯하다. 그러나 단어를 치환시켜도 의미가 상통한다고 해서 합당한 서술이라고 결론지을 수는 없다. 관계성은 사태의 종착점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기 때문에 교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 과정은 비유를 위한 것이 아니라 동질적인 것에서 덜 동형적인 것을 찾아내려는 것인데, 바로 그 차이가 미술의 장소에서 최소한(혹은 최대한)의 기능적 조건이 무엇인지 묻는 질문의 대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매시는 ‘모든 사회적 과정은 어떤 식으로든 로컬 수준에서의 변이와 작동의 차이를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다’ 고 얘기한다. 중요한 것은 바로 차이다. 무엇이 특정한 관계를 차이를 지닌 것으로 만드는가. 지리적 문제에서 예술의 범주로 건너뛸 때 생기는 간극에서 남겨진 잉여분은 거칠게 말해 예술작품이다. 바로 작품이 차이를 이끌어낸다. 작품은 장소를 무엇으로 만드는가? 작품은 이 장소를 어떻게 만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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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으로, 어떻게 만드는가?”라는 질문 속에서 예술작품은 더 이상 내재적으로 완결되는 것이 아님을 드러낸다. 기나긴 인류의 역사에서 아주 티끌만 할 뿐인 포스트-미디엄의 시대를 제외한다면 예술은 소리를 비롯한 물질을 가두고, 제약하고, 통제하고, 깎아내어 조형하는 일(을 관습으로 만드는 일)과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술은 일종의 재현이 되고 심미적인 것이 되었으며 인간학이(그리고 상품이) 되었다. 이제 예술의 역할은 외재성을 재-구성, 탈-구성하는 것으로 기능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전제 조건은 그 예술작품이 기능 이후 망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벨탑 신화는 흔히 신의 권능에 도전한 인간이 벌을 받아 하나의 언어를 잃고 의사소통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내용으로 읽힌다. 그러나 대니얼 헬러-로즌의 꼼꼼한 독해에 따르면 「창세기」에는 신이 원래의 공통된 언어를 파괴하거나, 새로이 수다한 언어를 창조했다는 명확한 구절은 존재하지 않으며, ‘혼동’시켰을 뿐이라는 모호한 표현을 쓴다고 한다. 그렇다면 혼동은 대체 무엇을 뜻하는가? 단테는 이에 대해 『속어론』에서 흥미로운 구절을 무심한 듯 괄호 안에 삽입 해 두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기서 혼란이란 이전 언어에 대한 망각에 지나지 않는다. confusionem illam que nil aliud fuit quam prioris oblivio).”

즉 언어는 사라지거나 새로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망각의 탑에 남겨지는 벌로 인해 잊어버렸을 뿐이다. 여기서 핼러-로즌은 언어의 다양성이 가능한 이유를 발견한다. 망각될 수밖에 없는 언어는 끊임없이 특정한 ‘성향 혹은 의지’에 따라 만들어졌기 때문에 ‘언어 형식은 지역과 역사에 따라, 끊임없이 서로 그리고 그 자신과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라짐을 통해서 새로운 상태를 구성하고 또한 이전의 부분이자 완전한 새로운 자기 자신을 형성하는 것은 신화를 향한 결핍의 충동이 아니라 끊임없이 장소를 구축하는 예술의 기능이기도 하다. 여기서 자폐적-열림은 중요하게 자리 잡는다. 만약 순간의 강렬한 감각적 경험만을 불러 일으키고 사라져 버리는 완전한 열어젖힘이라면, 그것은 예술의 기능이 아닌 일종의 자극일 뿐이다. 또한 망각되지 않고 견고하게 닫혀 있는 것이라면 언어가 수다해질 수 있었던 가능성이었던 외재성을 향한 기능은 작동하지 못한다. 결국 자폐적-열림이란, 애초에 거리를 가늠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던 도심의 소음을 마주하는 체험과 같다. 명백히 존재하지만 다다를 수 없는, 혹은 닿는 순간 사라져 버리는 거리. 망각을 향한 개연성은 당대 예술실천의 다른 이름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만 소리는 하나의 매체(media)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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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옥상에 앉아서 언제나 바로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 어떠한 소리도 듣지 못하는 날과 참을 수 없이 시끄러운 소리가 방해하는 날이 더 많았다. 정지가 아닌 불능의 상태였다. 그리고 그런 나날이 더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이 둘은 사실 거의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맞닿아 있을 것이며, 소리는 그 사이에서 진동할 뿐이다. 진동이 어디로 어떻게 수신될지는 나름의 문제일 것이다.

이한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