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09년 갤러리쉬필라움에서 진행된 개인전시의 서문입니다.




수집, 매혹의 순간 그 지점에서


박석태(미술사/스페이스 빔 학술팀장)


대안적이고 실천적인 예술의 형태를 고민하는 쉬필라움은 그 자체로 기존 예술형식을 담아내는 공간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인천항이 한눈에 내려 보이는 입지적 조건도 특별하거니와 내부의 공간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조합의 이미지는(이 공간이 본래 미술관 용도로 지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수많은 변종의 아이러니를 생산해내는 기지와 같은 역할을 한다. 즉 인천항이라는, 머물렀다가 사라지곤 하는 공간이 주는 아련함은 항구도시의 숙명적인 관념적 이미지를 생산해내는데, 이는 다양한 인자들의 복합적 상호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그 만남과 헤어짐이 반복적으로 만들어내는 변증법적 세계가 펼쳐지는 시공간에 쉬필라움은 위치한다.
쉬 필라움이라는 오브제로서의 공간은 또 어떠한가? 개항장에 속했지만 한편으로는 그것과 완전한 합일을 이루지 못하는 위치에 자리 잡음으로써 또 한 번의 타자화를 스스로 만들어내고 있다. 이러한 위치 성격은 예술 공간으로서 쉬필라움이 갖는 성격을 단편적으로 시사하고 있다고 보인다. 말하자면 근대 시민적 삶(제국주의의 수탈의 현장일 수도 있다)의 궤적이 오롯이 숨 쉬는 곳에 위치하면서도 그것과는 또 일정한 거리에 있는 것이다. 위치는 그것의 위상을 증명한다. 부표처럼 떠도는 강요된 근대적 삶의 공간은, 예술적으로 풀어보자면 아무 것과도 완전히 융합하지 못하는 관찰자로서의 시선을 담보하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임에 분명하다. 따라서 쉬필라움은 삶과 예술의 경계선이라는, 불안하지만 역설적으로 양면을 모두 포괄할 수 있는 바로 그 지점에 서 있다.

작가 길다래가 펼쳐 보인 그만의 '수집품'은 쉬필라움의 이 같은 성격과 많은 부분 유사성을 보인다. 쉬필라움이 삶과 예술의 경계점에서 양자 모두에 관여하는 예술적 도발을 끊임없이 시도한다면, 길다래의 '수집품' 역시 스스로의 예술 개념과 삶의 공간이 만나는 바로 그 매혹의 지점을 탐색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쉬필라움이라는 복합적 공간과 길다래의 수집품들은 묘한 공생관계 속에서 때로는 미끄러지고, 때로는 합치하면서 다양한 변종의 이미지와 관념들을 만들어낸다. 그런 점에서 길다래의 이번 전시 '수집'은 특정장소(Site specific)적인 동시에 다중맥락(Multi context)적이다.
공 간 안에서 마주치게 되는 드로잉을 비롯한 이러저러한 '물건들'은 서로 함께 만나기에 불편해 보이기도 한다. 타원형의 탁자 위에 마치 무질서하게 보이는 것처럼 놓인 동물들의 미니어처(동물들의 머리는 하나같이 흰색의 물감이 칠해져 그 표정을 알 수가 없도록 되어 있다)와 쓱쓱 그려낸 듯한 작은 드로잉, 프랑스의 어느 성(城)을 찍은 사진의 복사물과 거기에 가해진 약간의 색채, '대화의 편린(Fragments d'un discours)'이라고 이름 붙인 스스로 만든 책자, 작은 드로잉북을 장식하고 있는 맥락 없는 사진 콜라주, 열린 여행가방 속을 채운 동물들을 그린 이미지, 프랑스어로 쓴 시의 액자, 허공에 매달린 금붕어 형상, 그것이 들여다보는 새장 속의 광경, 그 속을 채우는 그로테스크해 보이는 알 수 없는 표정의 어떤 것들, 부러진 뿔이 애처로운 사슴 그림, 이 모두는 그에 의해 '수집'되어 하나의 공간 안에 놓이고, 매달리고, 갇혀 있다.
'수 집'은 길다래에게 행동과 결과 모두를 의미하는 것 같다. 전제하자면 그에게 '수집'이라는 행위가 일어나는 순간의 감정은 매우 내면적이고 섬세한 차원이어서 그것을 이해하는 데에도 역시 특별한 정서를 동원해야 할 성 싶다. 그렇다고 그 '특별한 정서'가 난해하다는 뜻은 아니다. 누구에게나 특정한 물건, 상황, 사람, 분위기, 사건 등이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느낌으로 다가오는 순간이 있다. 길다래는 그것을 '매혹의 순간'이라고 부르는데, 따라서 그의 '수집'은 철저하게 주관적인 차원과 맥락에 위치한다. 그렇다면 그가 관객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일기처럼 어느 날, 어느 곳에서 마주친 사물들에 대한 내면적 기록 차원에서 멈추는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길다래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그가 선택한 일상적 사물의 이미지가 아닌, 다시 말하자면 그가 선택한 사물들이 주는 다소 엉뚱한 정서가 아닌, 모든 사람이 갖고 있는 각자의 '매혹의 순간'의 기억을 떠올리게끔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운명적 만남(그것이 사물이든 사람이든 장소든, 혹은 동시에 작용하든 상관없다)이라고 할 수도 있겠는데, 따라서 그의 '수집' 작업은 내밀한 선택에 의한 '수집품'을 계기로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보편적 정서를 떠올리게 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고 보인다. 그러므로 '수집'의 결과물은 다시 관객의 참여 속에서 각각의 맥락을 만들어내어, 결과적으로는 또 다른 '매혹의 순간'을 일구어내는 순환적 구조를 가진다

이쯤 되면 길다래의 작업이 매우 언어적이라는 데에 이견이 없을 것 같다. 언어로는 표현 불가능한 영역을 다루는 조형언어라는 말도 존재하지만, 그의 '수집' 작업은 조형적이면서도 언어적이기도 하다. '수집'이라는 행위는 그에게는 드로잉이라는 행위와 동격을 이룬다. 드로잉이 작가의 생각을 일정한 평원 위에 형상화하는 것이고, 길다래의 '수집'이 생각 속에서 이루어진 단어와 이미지를 생성하여 공간 안에서 재구성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렇다고 해서 '수집'의 과정을 이끌어내는 '매혹의 순간'이 전면적으로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은 아닌 듯하다. 스스로의 설명대로 그 '순간'은 말로서 정의할 수는 없으나, 자신의 모든 감각이 총체적으로 융합하여 이루어지는 것인 바, 분명 일정 부분 개념화된 언어적 사고가 반드시 거기에 개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순간'이라는 말은 필연적으로 시간성을 떠올리게 한다. 풀어서 말하자면 매혹 당하는 그 순간은 모든 감각이 그 대상에게로 향하여 잠시 혹은 마치 영원처럼 시간이 멈추는 듯하다. '순간'이라는 짧은 단어를 설명하는 데에도 이처럼 많은 언설을 동원해야 하니, 어찌 보면 언어적이라는 말 속에는 서로 다른 사람들의 독특한 기억을 구태여 묶고자 하는 억지스러운 구석이 있는 것 같다. 바로 그 지점에 길다래 작업의 독특함이 있으며, 이는 앞으로의 그의 행보를 기대하게 만드는 요소로 보인다.
이 처럼 여전히 길다래의 '수집' 작업에서 풍기는 인상은 시각성과 언어성이 공존한다는 점이다. 작품이 언어화되고, 언어는 시각성을 갖는다. 언어 이미지(verbal image)라는 말을 직역하면 언술을 가시적인 코드로 번역한 글이 된다는 뜻이다. 언어가 쓰여진 형태로 진화할 때 원래는 도상적인 형상이나 그림이 축약, 변화하여 자모로 정착되었다는 것이 새삼스러운 이야기는 아니다. 결국 쓰기와 그리기(만들기)는 처음부터 분리할 수 없는 의미표현과 전달의 방법이었던 셈이며, 문자가 고안되고는 문자와 그림이 공존하는 경우도 많이 생기게 되었다. 길다래의 '수집' 작업에서 보이는 '수집품'들과 문자가 공존하는 태도는 따라서 다양한 방법으로 보는 이들의 기억에 대한 인식에 개입하고 있는 셈이다. 조형언어와 실제의 언어가 불완전성을 전제로 한다면, 그의 작품은 이 둘의 의미전달 방식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형식실험을 지속하고 있는 것이다.
글 과 조형작품의 공존관계를 분류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 롤랑 바르트에 의하면 모든 그림의 기의는 유동적인 "떠도는 사슬고리"로, 그 의미를 글이 고정하거나 중계한다고 한다. 여기서 고정이란 그림에 제목을 다는 등의 명명의 기능을 뜻한다. 이와는 달리 글과 그림이 하나로 합성된 것이 이코노텍스트(iconotext(e))라는 것으로, 이는 각각 정체성과 독자성을 유지하면서도 분리될 수 없으며 서로에 대해 종속적인 기능을 갖지 않는 것으로 이미지텍스트와 유사하다.1) 이렇게 볼 때 길다래의 '수집품'들은 때로는 종속적으로(iconotext(e)), 때로는 무관심한 관계로 이루어져 다중적인 의미를 끊임없이 생산해 내는 것으로 보인다.

일상적이면서도 그 기억을 떠올리기에는 너무 낯선 공간으로 변한 쉬필라움, 기억의 흔적을 제시하지만 하나하나가 모두 제각각의 의미를 뿜어내며 생경함을 만드는 길다래의 '수집품'들은 하나의 공간 안에서 수렴된다. 이 각각의 낯섦은 그것을 경험하는 이들에게는 또 다른 특별한 순간으로 다가와 그 숫자만큼의 낯선 기억으로 재생산되고 파편화한다. 애초 길다래의 '수집'이 갖는 의미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무표정하게 보는 이들의 시선을 맞받아치는 길다래가 만들어낸 무언의 존재들은 역설적으로 다양한 상황과 정서를 만들어내어 셀 수 없는 표정의 조각들을 던져준다. 우리는 어떤 기억, 어떤 표정으로 그의 알듯 모를 듯한 표정을 받아들이는가? 바라보는 우리 자신이 멈추어진 순간의 '수집품'이 되어 그 이상한 공간에 박제처럼 굳을지어다. 그렇다. 이제 우리는 '매혹의 순간' 어느 지점에 서 있다.




Image-Music-Text, tr.Stephen Heath (Hill and Wang, 1977), pp.38-41; Michael Nerlich, Iconotexte(Ophys, 1990), p.268; 박일우, 「글과그림」,『문화와기호』한국기호학회편(문학과지성사, 1995), 387쪽에서재인용.